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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300-사회과학

폭력(2009), 공진성, 책세상 : 폭력에 관한 고찰, 촛불은 폭력일까?

by 시시프 2009. 4. 18.

<알라딘 TTB에 선정되어 5만원 먹었습니다.>

        2008년 여름을 달구었던 촛불이 있었습니다. 결과에 대한 평가는 많이 엇갈리겠습니다만, 청소년층이 국가정책에 대한 직접 당사자로서 자발적으로 시위를 주도했다는 데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시위 문화도 가시적, 내용적으로 상당히 변모했습니다. 애국가마저 편곡되어 흥을 돋우는 소스가 되었으니 그 내용의 경쾌함은, 문화제로 명명하는 게 정말 옳겠다 싶었습니다.
        당시 촛불과 그 반대편에서는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자기는 폭력이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시위대는 비폭력 평화를 주장하며 가시적 폭력을 제거하려 했고, 경찰 측에서도 최대한 물리적 마찰을 피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폭력은 분명 나쁜 것일 테지요. 그럼 여기서 폭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권력을 위시한 국가와,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촛불은 둘 다 폭력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했던 걸까요? 폭력을 판별하는 명확한 공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없으니 문제지요. 이 책은 폭력의 생성과 작동을 설명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150쪽 정도의 적은 분량에 논리도 잘 꿰어 있어 읽기도 쉽습니다. 
        무엇이 폭력인지 아닌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책 안에도 정답은 없습니다. 사실 정답은 아무 데도 없지요. 그저 판단하고 선택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선택이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무엇이 됩니다.

그리스 반정부 시위 中, 08년 12월 13일


수신자 언어 우선성의 원칙


        일반적으로 폭력은 수신자 언어 우선성의 원칙을 따를 수 있습니다. 피행위자의 판단이 폭력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상대를 위해할 목적이 없었다 할지라도 상대가 고통을 느낀다면 폭력이 됩니다. 즉, 폭력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국가, 새롭고 거대한 폭력의 탄생


        홉스는 자연상태라는 가상을 설정하여 국가와 폭력의 탄생을 설명합니다. 홉스의 유명한 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 자연상태입니다. 자연상태에서는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이 없습니다. 규범이 없으니 악한 인간은 지들 마음대로 다른 인간을 해합니다. 여기서 개인의 자기보존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 됩니다. 자기보존을 해하려는 상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그보다 강한 무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게 되지요. 오직 폭력만이 자기보존을 위한 권리 행사가 됩니다.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죽고 죽이는 만인의 투쟁은 결국 공동체를 파멸시킵니다.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이 폭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자연상태에서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고 더 더 큰 폭력을 부릅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사용한 폭력의 필연적 귀결이 파멸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지요. 그래서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자기보존의 자연적 권리를 양도하면서 평화를 이룩합니다. 이게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 국가입니다. 국가는 양도된 개인 폭력의 총체로서 각 구성원의 자기보존을 위해 탄생합니다. 국가는 폭력의 총체이므로 최선이 아닌, 자연상태라는 최악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되는 차악이 되지요. 이로써 개인폭력에 대한 국가폭력의 압도적 비대칭성 앞에서 개인은 감히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했다간 바로 죽음, 생존율 = 1/무한대가 되거든요. 


폭력 판별의 또 다른 기준, 정당성


        우리는 정당하게 행사된 폭력은 폭력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폭력은 정당하지 않게 행사될 때 폭력이라 불립니다. 그럼 여기서 폭력의 정당성 판단이 중요해지는데, 이 정당성 판단을 누가 하는지의 문제가 생겨납니다. 국가에 귀속된 개인은 상대를 강제하는 어떤 폭력도 행사할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유효한 판단이란 것은 상대를 강제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데, 상대를 강제하는 모든 힘(폭력)이 국가에 양도되어 개인은 어떤 유효한 판단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유효한 정당성의 판단마저 폭력과 함께 국가에 양도돼 버립니다. 절대주의 시대의 국가가 이런 형태지요.
        하지만 인간은 생각이란 게 있어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개인의 판단과 국가의 판단이 상충하는 지점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만일 구성원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현저히 침해할 경우, 개인은 국가의 판단에 따르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극적 개념의 시민불복종과 적극적 개념의 저항권이 여기에 속합니다. 시민의 저항권 행사를 통해 국가를 전복시킨 예는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아왔지요.


저항권의 법제화, 민주주의


        국가에 의해 대내적으로 정당한 폭력이 독점되고 대외적으로 독립일 때 이를 주권이라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각주:1]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주권행사의 주체를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폭력의 원천은 국민이며 그것의 정당한 사용 권한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국민 개개인의 주권행사는 대의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해진 절차를 통해 발현됩니다. 민주주의는 폭력의 독점과 정당성을 강제력이 아닌 국민의 동의를 통해 입증하는 체제인 것이지요.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언제든지 법적 절차에 의해 오류를 수정하게 하는 성찰적이고 반성적인 체제입니다. 국민의 저항권 행사로 국가가 전복되어 발생할 사회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민의 저항권을 체제 안에 삽입함으로써 꾸준히 그 정당성을 입증합니다.

        2008년의 촛불은 국민 개개인의 판단이 국가의 판단과 상충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요.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야 할 민주주의 채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국민은 거리로 나올 수밖에요. 국민 주권은 국가 판단의 정당성을 시험대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시위에서 발생한 경제적 비용, 현행 집시법의 위반 등으로 촛불을 재단하는 것은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촛불이 타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게 우선되어야 할 일이지요. 촛불을 보고 우민愚民주의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상해보면, 우리 그 때 공부 참 많이 했었지요. 온 국민이 광우병 박사가 되었으니까요. 분명 우민愚民은 촛불이 타오르지 않던 시절에 더 많았을 겁니다. 많은 의견이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촛불은 민주주의 안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1.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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