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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2010. 7. 24.
낙화, 이형기 앞마당에 목련이 탐스럽게 피었다가 하룻밤 새 시들해졌다. 오늘 비 갠 아침 나가보니 꽃은 기어이 다 지고 없다. 봄인 줄로 착각하고 바깥에 내어놓았다가 뜻밖에 내린 눈에 아끼던 화초도 몇 죽였다. 기다려도 오지 않던 봄이, 반가운 기색 내보일 여유도 주지 않고 벌써 멀리 갔다. 만물의 생명이 태동하고 희망의 잎새를 틔우는 봄날에도 우리는 이별을 준비한다. 내가 떠나야 할 날도 알지 못하는데, 네가 떠나는 날을 어찌 알고 나는 준비를 할까. 그래서 매일이 가슴 아픈 이별의 날이다.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2010. 4. 27.
멋진 신세계(1998), 올더스 헉슬리, 문예풀판사 역시 명불허전. 오줌마저 참아가며 읽게 만들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책이라는 사전 정보를 습득하고 읽었으나, 어쩐지 디스토피아로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 오히려 진짜 멋진 신세계로 느껴지는 이유는, Mr.헉슬리가 비판코자 했던 그 인간성 상실의 물질주의에 오염된 탓인가. 55쪽: "물론 그 남자를 포기할 필요는 없어. 이따금 다른 남자하고도 상대하면 되는 거야. 포스터는 다른 여자들하고도 놀지?" 레니나는 그 점을 시인했다. "물론 그럴 거야. 그 남자는 완벽한 신사야. 빈틈이 없어. ……." 다른 여자들하고도 마구 놀아나야 완벽한 신사가 되는 세계, 이야말로 레알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 2010. 4. 13.
오적五賊(1970), 김지하 1969년 시월, 박정희 독재정권은 또 다시 3선개헌이라는 no turning back의 다리를 건넌다. 물론 개헌 과정도 변칙과 탈법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할수록 권력은 부패하고 타락한다. 이런 와중에 70년 유월에 필명 김지하, 국제적으로는 언더그라운드 킴이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패와 타락의 전횡을 통렬하게 풍자한, 저 유명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발표한다. 물론 이로써 그는 투옥되고, 그의 타는 목마름의 수난 시대가 열린다. 1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 2010. 1. 10.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09. 12. 24.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만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스물.. 2009. 12. 20.